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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창고/국내외 사건, 사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정리

by 2centi 2021.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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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과거 사건 중 '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 에 대해 정리해보겠습니다

 

출처 : tvN 유튜브 알쓸범잡 EP.11 캡처

 

사건 정리에 대한 내용은

여러 매체 자료를 모두 총합하여

단순한 복붙 ( 복사 + 붙여넣기 ) 가 아닌 사건 순서, 요약, 구체적으로

나눠서 직접 작성한 내용입니다

 

" 책상을 ' 탁! ' 치니까 ' 억! ' 하고 죽었다 "

 

살면서 위와 같은 말도 안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었을 것입니다

이 내용과 더불어

2017년 12월 27일에 개봉한 영화 ' 1987 ( 1987 : When the Day Comes ) ' 은

오늘 정리할 '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 을 다루고 있습니다

 

SMALL

출처 : tvN 유튜브 [알쓸범잡 부록] 1987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실을 밝힌 사람들! #알쓸범잡 EP.11 캡처

( 위 사진의 5층 조사실 창문 크기를 확인해주세요

5층은 16개의 조사실이 엇갈리게 배치되어 있으며 나선형 계단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 이란,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입니다

 

언제 : 1987년 1월 14일

어디서 :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누가 : 박종철

어떻게 : 조사중 사망

왜 : 고문, 폭행

 

 

이 사건은 전두환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14일,

경찰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불법 체포하여 고문하다가 사망하게 했는데,

이 사건은 공안당국의 조직적인 은폐시도에도 불구하고, 진상이 폭로되어

1987년 6월항쟁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출처 : tvN 유튜브 영화{1987} 실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highlight #알쓸범잡 EP.11 캡처

 

시간순서로 보는 사건 정리

 

1986년 4월   1일 / 서울대학교 재학생 박종철이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로 구속됨

1986년 7월 15일 / 박종철은 징역 10개월 ( 집행유예 2년 ) 을 선고받고 출소

 

1987년 1월 13일 / 출소 후, 학생운동 활동을 이어가던 박종철은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에게 연행됨

1987년 1월 14일 / ' 대학문화연구회 '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묻는 고문을 당하던 중 조사실에서 사망

                        우연히 사건의 단서를 접한 중앙일보 ' 신성호 기자 ' 가 박종철 사망 관련 2단 기사를 내보냄

1987년 1월 15일 / 치안본부장 ' 강민창 ' 이 박종철은 수사 중 동연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

1987년 1월 16일 / 사건 당일 현장을 목격한 중앙대병원 전문의 오연상이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제기

1987년 1월 17일 / 박종철 부검을 담당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적준 박사가

                         물고문 흔적이 확연히 드러나는 부검 결과 발표 ( 전기고문은 의문으로 남음 )

1987년 1월 19일 / 물고문 사실은 시인하고,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됨

                         고문에 대한 시민 항의가 민주화투쟁으로 이어지자

                         정부는 내무부장관 김종호가 치안본부장 강민창을 전격 해임

 

 

1987년 5월 18일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정부의 사건 축소조작을 폭로

                         경찰과 검찰의 사건은폐조작 시도와 관련한 규탄대회와

                         박종철 추모집회가 개헌논의와 연결되면서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짐

1987년 5월 20일 / 고문가담 경관이 5명이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구속

1987년 5월 29일 / 2억원 입금 통장 등으로 범인 축소조작에 나선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 등

                        3명이 범인도피죄로 구속됨

 

1988년 1월 15일 / 황적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과장의 경찰 회유메모가 보도되면서

                         당시 치안본부장 강민창이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됨

1989년             / 박종철 군의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1억 2천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냄

1995년 11월      / 대법원은 국가와 고문경찰관 다섯은 연대해서 1억 4천 7백만원을,

                        경찰수뇌 4명은 2,4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림

2000년 12월 26일 / 대법원은 " 배상액의 70% 일선 고문 경관들이 배상하라 " 는 판결을 내림

( 2000년 온라인 뉴스부분에 12월 26일 판결기사는 있지만, 1995년 관련 내용은 남아있지 않아

재 판결을 낸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음 ㅠ < 아시는 분은 댓글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박 군의 유가족들은 총 2억 4천만원의 손해배상금을 수령함

( 이자를 포함한 금액으로 이에 대한 날짜를 정확히 알 수 없어 따로 정리 )

 

 

출처 : tvN 유튜브 영화 {1987} 실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highlight #알쓸범잡 EP.11 캡처

 

역사적 배경

 

전두환정권의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은 1980년대 중, 후반 더해가고 있었는데,

전무환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14일

경찰 대공수사관들은 '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불법으로 체포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전두환 정권은 직전 해인 1986원 10월 28일에 있었던 ' 건국대학교 ' 항쟁 진압 이후,

' 반제동맹당 사건 ', ' 마르크스-레닌주의당 사건 ' 등의 공안조작 사건들을 만들어내며

소위 ' 얼음정국'을 조성하던 시기였습니다

 

 

사건의 경과 요약

 

경찰은 박종철에게 폭행,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고, ( 전기고문은 확실치 않음 )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박종철은 사망했습니다

다음날인 15일 강민창 치안 본부장은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 억 '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 " 고 공식 발표했는데,

부검의의 증언과 언론 보도 등으로 의혹이 제기되자

19일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했고,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 등 2명을 구속했습니다

 

그렇지만,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된 경찰의 은폐조작을 폭로했고,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2명이 아닌 5명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으며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 및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참여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은폐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구체적인 내용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박종철은 수사관에게 연행되어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경찰은 박종철을 추궁했지만

박종철은 모른다고 했고,

이에 과민반응한 수사관들은 박종철의 옷을 모두 벗기고,

조사실 안에 있는 욕조로 끌고가 물고문을 반복했습니다

 

( 당시 물고문에 가담한 수사관들은 조한경, 강진규, 반금곤, 이정호, 황정웅 5명입니다 )

 

출처 : MBCentertainment 유튜브 [선을 넘는 녀석들 - 리턴즈] 박종철 고문치사의 현장 9호 조사실, 왜 이런 악행을 저질렀을까? 20200426 캡처

 

 

그래도 모른다고 하자,

수사관들은 박종철의 결박당한 두 다리를 들어올려 또 다시 물고문을 가했고,

고문 도중 욕조의 턱에 박종철의 목 부분이 눌리며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으로 의식을 잃었습니다

 

의식을 잃은 건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이 수사관에게 연행된 다음날로

구체적으로 어떤 고문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폭행, 물고문이 있었음이 후에 밝혀졌습니다

( 전기고문은 의혹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

 

박종철이 의식을 잃자,

경찰은 중앙대학교 부속 용산병원의 오연상 의사를 불러왔는데,

이 의사는 후에 자신은 진료가 아닌 사체 검안서를 썼다고 밝혔습니다

( 자세한 내용은 하단에 )

 

당황한 수사관들은 이 사건의 은폐를 위해

대공분실 부근의 용산 중앙대학교병원으로 이송해 응급처치를 시도했지만,

박종철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고,

 

이들은 박종철이 병원에서 숨진 것으로 조작하려 했으나

중앙일보 서울지검 출입 기자 신성호가 바로 보고하여

2단짜리 꼭지에 ' 학생이 남영동에서 죽었다 ' 는 단신 기사가 들어갔습니다

 

 

( 최초보도인 이 기사는

1987년 1월 15일자 사회면에서 나온 <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 라는

제하의 2단짜리 기사였는데,

이 후, 중앙일보는 후속 보도에는 소극적이었다고 합니다 )

 

사회면 한 구석에 있었던 이 기사는

신문이 배포되자 모든 신문사에서 중앙일보에 전화를 걸어 진위를 물었고,

이후 문공부 ( 문화공보부 )는 중앙일보에 난입하여 깽판을 치고 갔습니다

 

출처 : MBCentertainment 유튜브 [선을 넘는 녀석들 - 리턴즈] 박종철 고문치사의 현장 9호 조사실, 왜 이런 악행을 저질렀을까? 20200426 캡처
출처 : MBCentertainment [선을 넘는 녀석들 - 리턴즈] 박종철 고문치사의 현장 9호 조사실, 왜 이런 악행을 저질렀을까? 20200426 캡처

 

 

1월 15일 밤 9시 5분부터 사건을 담당한 서울지검 공안부 부장검사 최환,

형사부 검사 안상수 등의 지휘, 부검의 황적준의 집도 하에 부검이 진행되어

박종철이 고문으로 인한 사망이 밝혀지게 되었는데

( 이에 대한 내용도 하단, 사건을 밝히는데 기여한 검찰 부분에 )

 

1월 16일, 치안본부장 강민창 ( 1933 ~ 2018 ), 치안감 박처원 은 기자회견에서

박종철의 사망원인에 대해

"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 " 라고 거짓 시인을 하는 바람에

이것이 정식 사인으로 언론에 발표되었으며

 

사체 외표검사에서 박종철의 왼쪽 무릎에 0.6cm의 철과상이 있었고,

오른손 엄지, 검지 사이에 손등쪽으로 작은 멍이 있었으며

내시경 검사 결과 오른쪽 폐에 탁구공만한 출혈반이 발견되었다고 밝혔는데,

 

강민창은 황적준이 " 출혈반이 생기는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전기 충격요법 및 인공호흡을 해도 생길 수 있으며

특별한 치명상은 발견이 안 되었지만, 목과 가슴 부위에 피멍이 있었다 " 고 말했다면서

고문 사실은 부인하였습니다

 

 

출처 : tvN 유튜브 [알쓸범잡 부록] 1987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실을 밝힌 사람들! #알쓸범잡 EP.11 캡처

 

당시 강민창의 발표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박종철은 1월 14일 아침 8시 10분경 관악구 신림동 하숙방에서 연행되어

9시 16분경 아침식사로 나온 밥과 콩나물국을 조금 먹다가

입맛이 없다면서 냉수를 몇 잔 마신 뒤,

10시 15분경부터 박종운 소재에 대하여 심문 도중,

수사관이 책상을 치자 박종철이 " 억 "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정오 즈음에 사망했다고 하였으며

 

강민창은 " 내가 아는 한 가혹행위는 없었다 ",

" 먼저 가족들에게 경찰이 결백하다는 걸 납득시키고 부검 결과가 나오면 나중에 떳떳이 전모를 밝히겠다 " 고 하여

" 박 군을 처음 본 중앙대 부속병원 의사 ( 오연상 ) 가 박 군이 쇼크사로 숨진 사실을 확인했다 " 고 밝혔습니다

 

 

1987년 1월 16일 경향신문 보도내용에 따르면

~ 10시 50분쯤부터 수사관의 심문을 받기 시작,

11시 20분쯤 수사관이 수배된 박모 군 ( 서울대생 ) 의 소재를 물으며

책상을 세게 두드리는 순간 의자에 앉은 채 갑자가 ' 윽 ' 하는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 는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출처 : tvN 유튜브 [알쓸범잡 부록] 1987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실을 밝힌 사람들! #알쓸범잡 EP.11 캡처

 

그러나 위 발표는 중앙대 부속 용산병원 내과의사 오연상에 의해 거짓으로 밝혀졌는데,

박종철은 병원에 옮기던 때에 사망한 것이 아닌 사건 당일 14일 오전 11시 45분경 이송 당시 사망한 상태였으며

 

자신이 도착했을 때,

박종철의 복부는 부푼 상태,

청진기 진단 결과 복부 등 몸 속에 ' 꼬르륵 ' 하는 물 소리가 났는데,

쇼크사의 경우 심장마비 뒤에 호흡곤란이 생기므로 쇼크사는 아닌 것으로 판단했으며

 

자신이 도착할 적 조사실 바닥에 물기가 있었고,

자신은 진료가 아닌 사체 검안서를 썼다고 밝혔습니다

 

 

폭발한 민심에 1월 19일,

정권은 2차 수사결과에서 고문이 있었다고 발표했으며

발표 결과, 박종철은 조한경 등 두 경찰에 의해 못 뒷덜미와 양손이 잡힌 채

두 번이나 욕조에 머리를 처박히다 목 부분이 욕조에 눌려 경부압박으로 질식사했으며

 

부검 결과 사망 시각이 14일 오전 11시 20분경이고,

복부팽만은 수사관들의 인공호흡 및 초진의사의 호흡기 주입으로 공기가 위장에 들어가 생긴 일시적현상이며

폐 조직검사 결과 수분이 검출되지 않았고,

폐 기공 현상은 박종철이 과거에 앓았던 폐결핵으로 인한 폐 손상 흔적,

왼손과 머리 부위에 입은 타박상은 저항으로 생긴 부상,

부검 내용 중 경부 압박 외의 사항은 박종철의 사인과 직접적 관계가 없다고 나왔습니다

 

1월 20일, 해당 사건을 서울지검측에서 송치받았고,

정구영 서울지검 검사장은 비공개 현장검증 다음날인

24일 수사결과 발표와 더불어 고문 경관들을 구속/기소한 사실을 밝히며

 

박종철 시신의 외상 소견과 부검 감정서 등으로 보아 전기고문은 없었고,

고문에 가담한 경찰관은 2명뿐이었다고 밝혔습니다

( 아직 고문에 가담한 경찰관이 5명이라고 밝혀지기 전 내용입니다 날짜순을 확인하시며 읽어주세요 )

 

 

박종철의 시신은 살해된 현장에 보존한 뒤 검사의 지휘를 받아 처리해야 하는데,

검사 지휘 없이 이송되어 부검 뒤 서울러 화장하여 증거를 인멸했습니다

박종철의 어머니 정차순은 화장에 반대하다 기절했는데,

당국은 정차순을 어느 병원에 놓고, 박종철 군의 화장을 강행했습니다

 

2월 7일 경찰에서는 김종호 내무부장관과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물러났으며

후임 내무부장관으로 군 출신 강경차 정권핵심인 정호용을 임명했습니다

 

출처 : tvN 유튜브 [알쓸범잡 부록] 1987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실을 밝힌 사람들! #알쓸범잡 EP.11 캡처

 

이 축소은폐된 사건이 드러나게 된 계기 중에는

당시 영등포교도소에서 수감 중이던 민주화운동가이자 동아일보 해직기자였던

이부영 ( 훗날 열린우리당 의장 ) 이 있었는데,

 

우연히 이부영이 수감된 교도소 옆방에 2명의 고문경찰관인 조한경, 강진규가 들어왔고,

옆방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 친분이 있는 교도관을 통해 알아보니

 

 

( 당시 군부 독재 정권 시절에는 교도소에 들어온 반독재 민주화운동가들에게

우호적인 교도관들이 상당수 있었다고 합니다 )

 

고문경찰관이 더 있는데, 우리만 잡혀왔다 자기들만 모두 뒤집어쓰게 됐다 하여

사건의 축소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이를 휴지에 적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하여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여기서, 이부영에게 사건의 전말을 알려준 사람은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정이었던 안유 였으며

이부영의 문서를 외부로 운반한 사람은 교도관 한재동 이었다고 합니다 )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마티아 신부에게 이와 같은 내용이 전달되어

1987년 5월 18일 518 민주화 운동 7주기 추모 미사에서 김승훈 마티아 신부가 폭로하여 사건의 진상이 드러났지만,

대한민국 제 5공화국 정권은 보도지침, 언론통제를 통해 이를 은폐하려 하여

일부 언론에서만 단편적인 보도가 등장했는데,

 

5월 22일, 동아일보에서 경찰의 사건은폐와 가담자 축소사실의 구체적인 내용을 처음으로 대서특필 하고,

이후에도 관련 후속보도를 이어갔습니다 ( 은폐관련 보도로 신문의 3분의 1 이상이 채워져있다고 합니다 )

 

 

전 날인, 5월 21일 정구영 서울지검 검사장은 추가적으로 3명의 고문경찰관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22일 경찰은 공동정범 3인을 스스로 연행해 (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 서울지검에서 구속되고,

이를 은폐하도록 지시한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 등이 추가 구속되었습니다

 

이 후, 박종철 사망 1주기인

1988년 1월 14일 당시 담당 부검의 황적준과 수사 담당검사의 증언으로 드러났는데,

부검과정에서 경부압박 질식사로 판명되어 보고했으나

강 치안본부장이 부검소견서를 변경하고 외상 부분을 빼라는 외압이 있었다 증언했고,

당시 수사검사인 안상수는 ' 관계기관 대책회의 ' 에서

초동수사를 경찰에 맡기기로 하면서 사건 조작의 여지를 주었다는 발언을 하였습니다

 

출처 : tvN 유튜브 영화 {1987} 실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highlight #알쓸범잡 EP.11 캡처

 

 

이 두분의 증언으로 검찰이 다시 수사에 나서며

1월 14일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은 자진 출석케 한 뒤 다음날 구속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강민창이 국과수 소장에게 100만원을 주며 회유하려한 사실이 드러났고,

황적준은 조직에 해를 끼쳤다며 국과수를 떠났습니다

 

( 1988년 최저임금은 1그룹 462.50 / 2그룹 487.50

2021년 최저임금은 8,720원임을 감안하여 봐주세요 )

 

출처 : tvN 영화 {1987} 실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highlight #알쓸범잡 EP.11 캡처

 

 

풀리지 못한 의문은 더 남아있고, 의혹도 불어났는데,

이 중 하나가 위에 언급했던 박종철의 폐에 나타난 출혈반으로 전기고문이 있었는가 에 대한 점이고,

그 외에는 사건 전개과정에서 치안본부장이 최고 사령부로써 독자적 권한을 발동해 사태를 수습 / 무마했느냐는 점인데,

 

이는 초동 수사과정에서 검찰의 명예를 걸고 즉시 수사해

진상을 규명하겠다던 검찰이 태도를 바꿔 경찰에 수사토록 한 점,

송치 4일만에 조한경 등 2명에 기소명령이 떨어진 것과 조한경 본인이 옥중 폭로를 했는데 3개월간 수사를 미룬점,

법무부 고위 관계자가 조한경 등이 수감된 영등포 교도소 ( 현 서울남부교도소 )를 방문하고,

3월 초 이들이 의정부교도소로 이감된 경위 등을 통해 의혹이 더 불어나기도 했습니다

 

사건을 밝히는데 기여한 검찰 ( feat. 경찰에 대한 악감정 )

 

15일 부검을 진행한 공안부 최환 부장검사가

청와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부검을 진행 및 원칙대로 일을 처리한 것도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큰 기여를 했는데,

최환 부장검사 지휘대로 소견서를 받고 실무를 처리한 것이 안상수 전 한나랑 대표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박종철 기념사업회 측은 이것을 보장하는 상황인데,

이들의 입장에 따르면

진실을 밝히는데 앞장섰던 것은 최환 검사였고,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사건 은폐를 일삼았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정확한 내용은 알려진 바 없지만,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는 96년까지 한겨레 등에 기고하는 등의 인권 변호사로 이름을 남겼고

간간이 책을 내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사건에 대해 밝혀진 사망 사인은 '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 '

정확히는 ' 물고문 도중 목이 욕조 턱에 눌리면서 질식사한 것 ' 으로 밝혀졌지만,

이를 수습한다고 신임 내무부장관 정호용이 "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 " 라고 해명했는데,

이 정호용은 ' 518 민주화운동 ' 당시 진압부대의 최고위직인 특전사령관이었다고 합니다

( 말이 안됀다는 말이죠..^^ )

 

그런데 이렇게 검찰이 부검을 강행한데는 경찰에 대한 악감정이 한몫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에 대한건 박종철 사건이 발생하기 6개월 전에 발생한 '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  때

검찰은 경찰의 요청에 따라 사건을 은폐해야 했는데,

 

5공 ( 제5공화국, 1981년 3월부터 1988년 2월까지 지속된 한국의 다섯번째 공화국 ) 때는

경찰이 검찰보다 힘이 세, 수사권 및 수사지휘권은 검찰에 있었지만,

독재정권 핵심부는 일선에서 반독재민주화세력을 때려잡는 경찰을 총애해

검찰은 경찰이 송치한 사건을 뒤치다꺼리 하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 당시

검찰 입장에서는 ' 성고문 ' 임을 알면서도 경찰뜻대로 ' 기소유예 처분 ' 을 내리고,

욕은 검찰이 다 먹었다는 분노가 일어난 상황이라 이런 분노가 박종철 사건에서 부검강행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이며

이 주장을 한 사람이 최환 검사였다고 합니다

 

어찌 되었던 관련 사건에 대해 원칙대로 일이 처리가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출처 : tvN 유튜브 영화 {1987} 실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highlight #알씀범잡 EP.11 캡처

 

사건 이후 관련자, 가해자들

 

정권이 무너졌지만, 당시 경질된 고위인사들은 지금까지도 호의호식하고 있습니다

 

집행유예로 석방하면서 내린 판결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 피고인들이 경찰에 봉직하면서 명예나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오로지 대공분야에 헌신했고

유죄판결 자체만으로도 그동안 쌓아올린 공로에 치명상을 입게 된 점을 참작, 집행유예를 선고한다 '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은둔생활을 해오면서

2006년 전직 경찰총수 25명과 함께 전시작통권 반대 성명서에 서명했고,

2018년 7월 8일 향년 85세로 사망했습니다

 

 

박처원 치안감은 같이 구속된 강민창과 함께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에서 진행유예 ( 8개월, 집유 2년 )

판결을 받고 출소 후 고문경찰관들의 대부 역할을 하며 이근안의 은신도피를 지원,

이후 카지노에서 10억 여원을 빼돌려 이근안 등의 고문경찰관들에게 지원,

범인도피 혐의로 다시 법정에 섰으나

고령, 당뇨병 등의 이유로 다시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노환으로 사망했습니다

 

이영창 치안본부장은 대한주택공사 ( 현 한국토지주택공사 ) 이사장을 역임하고

제 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경북 경산-청도에서 당선되었습니다

 

서동권 검찰총장은 안기부장으로 3년 6개월 재직 후,

대통령 비서실에 있으며 정권의 2인자 역할을 하였는데,

전직 안기부장들이 당했던 구속은 커녕 불구속기소조차 당하지 않고 편안한 노후를 보냈습니다

 

정구영 검사장은 ( 사건 은폐축소를 시도했음 )

노태우 정권에서 23대 검찰총장을 역임했으며 진로문화재단 이사장입니다

 

김성기 법무장관은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 주택은행 이사장으로 출세했습니다

 

 

정호용은 13대, 14대 모두 대구광역시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박상옥 ( 당시 사건의 담당 검사 ) 2015년 대법관 후보자로 내정되었고, 대법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타격을 입은 건 말단 경찰관들뿐이었으며

그 경찰관 5명도 징역 3~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3년 만기부터 최고 7년 3개월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가성방되었습니다

 

그러나 1998년 6월 8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에서

조한경, 강진규, 이정호가 출소 직후 경찰 산하기관에 취직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일었습니다

 

기념 & 추모

 

1987년 1월 16일 아침에 벽제화장장 ( 현. 서울시립승화원 ) 에서

박종철의 시신을 화장 후 임진강에 산골하였기 때문에

박종철의 묘소는 따로 없지만,

 

1989년 초혼장을 치룬 후,

산골한 곳의 흙을 관에 담아 가묘를 만들었는데,

이 가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있습니다

 

 

출처 : tvN 유튜브 영화 {1987} 실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highlight #알쓸범잡 EP.11 캡처

2017년 12월 27일 영화 ' 1987 ' 에는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1987을 다뤘으며

 

그 외에도 그를 추모하는 조형물이 몇 개 있는데,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는 박종철이 당했던 고문을 형상화한

' 박종철 열사 기념비 ' 와 흉상,

2002년 모교인 혜광고등학교에 세워진 펜촉 모양의 기념비,

녹두거리 대학 5길에 있는 박종철 거리,

( 2018년 1월 13일, 31주기를 하루 앞두고, 그가 지냈던 하숙집 골목 앞 길이 ' 박종철 거리 ' 로 제정됨 )

박종철 거리 인근 도덕소공원 담장에 그의 모습을 그린 벽화가 있습니다

 

 

박종철의 죽음 이후

 

민주화 이후 1989년 박종철군의 유가족들은

국가와 고문치사사건 관련 경찰관들을 상대로 1억 2천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냈고,

 

출처 : tvN 유튜브 영화 {1987} 실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highlight #알쓸범잡 EP.11 캡처

 

1995년 11월 대법원은 국가와 고문경찰관 다섯은 연대해서 1억 4천 7백만원을

그리고 경찰수뇌 4명은 직무유기 및 범인 도피의 책임을 지고, 2,4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으며

이에 박 군의 유가족들은 이자를 포함하여 총 2억 4천만원의 손해배상금을 수령했습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던 안상수는 당시 담당 검사였고,

이후 한나라당 ( 당시 문민정부 하 신한국당 ) 으로 자신이 주동적으로 사건 은폐를 막았다고 주장하나

국가에서는 안상수의 상관인 최환 부장검사가 박종철 시신의 부검을 지시하여 사건의 은폐를 막았다고 반박했습니다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는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가 열리고

이에 박근혜가 " 도대체 어쩌라는 거냐? " 라는 식으로 책상을 쿵쿵 내리쳤다는 반응을 보이자

이 사건이 다시 재조명 되었습니다

 

출처 : YTN news 유튜브 '박종철 고문치사' 31년 만의 늦은 사과..."그래도 고맙다" / YTN 캡처

 

2018년 3월 20일, 문무일 검찰총장이

요양원에 있던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를 만나 31년만에 고문치사사건에 대해 사과했는데,

현직 검찰총장이 과거사에 대해 직접 사과한 것은 이 일이 처음이었습니다

 

[ 출처 : NAVER 지식백과, 나무위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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