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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창고/국내외 사건, 사고

1999년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 정리

by 2centi 2021.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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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오랜만에 과거 사건, 사고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오늘 정리할 내용은

1999년 10월 30일 '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 ( 인현동 화재 ) ' 입니다

 

사고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NAVER지식백과에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순서로 정보가 나열되어 있어

사건에 대한 파악이 쉬울 것 같아 가져왔어요~

 

 

언제 : 1999년 10월 30일 저녁

어디서 : 인천광역시 중구 인현동 ( 인천광역시 중구 우현로83번길 10 ( 인형동 27-43 ) )

누가 : 중, 고교생을 포함한 56명의 인명

무엇을 : 화재

어떻게 : 불에 타거나 연기에 질식하여 사망

왜 : 사회의 안전불감증과 공무원의 부정부패로 인한 화재

 

 

1999년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

 

그럼, 이제 자세히 알아볼까요?

 

1999년 일어난 인천 호프집 화재사건은

정부 수립 이래 3번째 규모의 대형 화재사고 입니다

 

1999년 10월 30일 오후 7시경 인천광역시 중구 인현동에 위치하고 있는 4층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로

건물 2층 라이브호프집과 3층 그린당구장에 있던 10대 중, 고교생들과 20대 초반의 청소년 등

손님 56명이 불에 타거나 연기에 질식해 숨지고,

 

 

71명이 연기에 질식 및 화상을 입어

중앙길병원, 인하대학교 부속병원, 인천의료원 등

인천지역 8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불은 이 건물 지하에 있는 히트노래방의 내부수리 공사장에서 처음 발생했는데,

전기 스파크가 튀어 시너에 옮겨붙으며 화재가 났다고 보도가 나갔지만,

며칠 후 이 내용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습니다

 

 

 

당시 지하 노래방은 내부 수리 공사 중이었고,

이 노래방에서는 17살 김모군과 14살 임모군이 아르바이트 중이었는데,

이들이 시너와 석유 중 어디에 불이 더 잘 붙느냐를 두고 말다툼을 벌이다

소주 한 잔 분량의 시너를 바닥에 붓고 불을 붙였는데,

바닥에 페인트를 지우기 위해 시너가 뿌러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불이 삽시간에 번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김모군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임모군은 추후 과실치사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이렇게 아르바이트생들의 장난으로 시작된 지하 1층의 화재는

계단을 타고 2층과 3층으로 번졌으며

이 날은 인천 시내 10여개의 고등학교에서 가을 축제가 있었는데,

가을 축제가 끝난 후, 뒷풀이를 하던 많은 청소년들이

있지도 않은 비상구와 비상계단을 찾아 헤매다 화를 당했습니다

 

'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 ' 이라 불리는 이유

 

 

 

여기서, 화재사고가 지하에서 발생했는데, '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 ' 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1층은 화재를 금방 알아채 대피했고, 3층 당구장에 있던 사람들도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면서

부상자는 있었지만, 사망자는 없었으며

모든 사망자는 2층 호프집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불은 긴급출동한 소방차 15대와 구급차 19대,

소방관 180명과 경찰관 160명에 의해 35분만에 진화되었습니다

 

학생 사망자수는

인천여상 8명, 경인여상 ( 현 인천보건고교 ) 4명, 광성고 4명, 계산여고 3명, 정석항공과학고교 3명 등

총 52명으로 최종 집계되었으며

 

사망한 학생의 90%가량은 인천 앞바다에 뿌려지는 형태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당시의 이 호프집 상황 & 구조

 

이 많은 중, 고교생들이 희생된 2층 호프집은

50여평 규모로 이 날 120명정도가 있어 북적인 상태였으며

내부구조가 탁자와 의자들로 빽빽이 가득차있고,

통로 공간은 겨우 한 사람이 다닐 수 있을만큼 비좁게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이로인해 화재사고 당시 대피할 공간을 찾지 못한채 서로 뒤엉켜 인명피해가 더 커졌으며

사고 당시 내부 구조물또한 인화성, 유독성 물질들이었기 때문에 연기가 순식간에 확산되었습니다

 

출입구도 하나뿐이었으며

창문은 구조변경을 할 때 통유리로 바꿔 달았고,

베니어판을 덧붙여 비상시에 쓸 수 없게 막아버렸습니다

 

 

이 외에도 대형사고, 대량 인명피해로 이어진 요인들로는

 

출처 : 동아일보

 

● 학생들이 화재로 대피하려 하자 돈을 내라며 소리치다 화재가 난 것을 알고

자신만 아는 비상구를 통해 혼자 탈출한 사장,

● 하단에 설명할 경찰과의 유착관계로

해당 경찰서에 미성년자 손님을 받아온 것으로 신고도 자주 있었지만, 경찰의 초동 대처가 없었던 점,

● 문제업소로 경찰에 적발되어 업소 폐쇄 명령을 받은 상황에서도

미성년자들에게 술을 파는 등의 불법영업을 계속 함,

●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된 이 상가 건물이

건축법상 소규모 건물로 구분되어 별도의 비상계단을 설치하지 않았고,

유일한 출입통로인 계단의 폭마저 1.2m 정도로 비좁함,

● 불이 난 건물 지하 노래방 천정에 설치되었던 ' 확산소화기 ' 가

화재 당시 공사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허가 없이 모두 제거되어 있었음

 

이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 호프집 ( 생맥주집 ) 은 불법영업을 해온 문제업소였으며

이 호프집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정성갑이 단속기관과 밀착되어 있던 사실이 드러나며

단순한 화재사건 이상으로 커졌습니다

 

호프집의 실질적인 소유주 정성갑

 

 

 

화재가 일어난 직 후, 종적을 감춘 정성갑은

1999년 11월 3일 오후, 충남 보령시 대천역 앞에서 경찰에 자수하였습니다

 

하지만, 변호사 타령, 뇌물 주지 않았다는 등의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다가

이후 5년간 교도소에서 복역한 이후,

2007년 CCM 가수로 교도소 등을 돌며 찬양사역을 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와 피해자들을 분노케 하였고,

2014년 기사에는 몇 년간은 공연때마다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는 발언을 했다는 듯 합니다

( 여기서, 호프집 실질적인 소유주인 정성갑과

돈 내고 나가라고 입구를 막다 혼자 도망친 명의상 사장은 별개의 인물입니다 )

 

 

 

언론에서는 정성갑의 전 관리인으로부터 입수한 비밀수첩에

1998년 말부터 1999년 1월 중순까지 인천 중부경찰서, 파출소 등에 얼마씩 지출했다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으며

 

인천호프집화재사건은

사회의 안전불감증과 공무원의 부정부패로 인한 인재가 여전함을 다시 확인해주는 사고였습니다

 

사건 이 후 이야기

 

이 사건으로 인해 1990년대까지 인천의 중심지였던 인현동은

도심으로서의 상징성이 관교동, 구월동으로 넘어갔고, 상권도 몰락했습니다

 

 

2004년에는 숨진 학생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현장 인근에 있는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뒤편에 위령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호프집이 있던 건물주는 참사 이후에도 책임을 지고,

( 호프집 사장 X, 호프집이 있던 건물 건물주 O )

매번 학생교육문화회관 앞 위령비에 가서 피해자들의 넋을 위로해주고 있으며

건물주 본인도 화재 당시 3층 당구장에서 뛰어내려 전치 3개월의 부상을 입었습니다

 

+ 2007년 7월 20일에 공개된 SAT의 노래 ' 이게 나에요 ' 뮤직 비디오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 발표한 업타운의 노래 ' UPT Padadoxxx ' 에는 이 사건을 비판하는 내용이 등장했고,

김금희의 소설 ' 경애의 마음 ' 은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였습니다

 

[ 사진 출처 : MBCNEWS 유튜브 캡처, 동아일보 ]

[ 내용출처 : NAVER 지식백과, 위키트리, 나무위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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