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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창고/국내외 사건, 사고

박순자 오대양 집단 변사 사건 정리 (사진 주의) + 이 후 이야기

by 2centi 2021.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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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꼬꼬무 10회에서도 나온

오대양 집단 변사 사건에 대해 정리해보겠습니다

 

 

 

꼬꼬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는

이번에 시즌2가 시작되죠

 

그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 1, 10회에서 소개되었던

침묵의 4박 5일 오대양 집단 변사 사건을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오대양 사건이란?

 

 

오대양 사건,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 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1987년 8월 29일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에 위치하고 있는

오대양 (주) 구내식당 천장에서 32구의 시체가 발견된 사건으로

종교집단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오대양 사건의 발단

 

 

이 사건의 발단은 박순자가 ' 오대양 ' 이라는 기업을 만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 오대양 '은 대한민국 과거에 존재했던 민속공예품 제조업체이자 사이비 종교 였습니다

 

여기서, 박순자의 과거에 대해 살펴보자면

과거 박순자는 여호와의 증인에 다녔었으며 그 후, 기독교 복음 침례회,

즉, 구원파에도 몸담았았고, 이후 독자적으로 기업을 가장한 종교 ' 오대양 ' 을 만들었습니다

( 여기서 구원파 ( 기독교 복음 침례회 ) 는 침례교회, 기독교 한국 침례회와는 별개의 단체입니다 )

 

일부에서는 박순자가 독자적인 종교를 만든 게 아니라

실제로는 구원파가 외부의 자금을 끌어모으기 위해 만든 산하 계열사로

박순자는 구원파 대전지역 자금 조달 책임자 였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대양 자금 내역에 대해

박순자가 오대양 설립 이전 물품 대금을 구원파 교인에게 사업관계로 송금한 사실이 있었지만,

이는 오대양 설립 이전이었으며

이 후, 한 차례 오대양에서 인형을 구입한 점 정도의 정상적인 거래가

확대 해석되면서 그러한 오해를 만든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여담으로, 구원파에서는 당시 오대양과의 연결 누명으로

2014년, 금수원으로 진입하려는 검찰에게 오대양 사건과의 무관함을 다시 한 번 밝혀달라는 내용을 주장하였고,

2014년 5월 21일 검찰은 인천 지방검찰청 공문을 통해

오대양 사건이 구원파 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확인된 바 없다고 밝혔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이 사이비 집단의 교주인 박순자는

1984년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에 민속공예품 제조업체인 주식회사 오대양을 세웠는데,

이 업체는 민속 공예품을 만드는 회사로써 대통령상도 받았고, 88올림픽 공식 지정업체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이 회사는 대전에 본사와 공장이 있었고,

용인에도 공장이 있었으며

사회사업에서도 굉장히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자수성가한 여성 사업가라하여 대전에서는 박순자를 칭송했습니다

 

박순자의 남편이 도청의 고위 공무원이었기에 신뢰가 아주 두터웠고,

사회사업으로는 유치원, 양로원, 고아원 건물을 사들이거나

보육시설과 초중고 대학교를 지원하는 학사운영 및 직원 기숙사 생활과 생필품까지 지원해주고,

직원의 가족을 우선적으로 채용했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 꿈의 직장 ' 으로 여겨졌습니다

 

 

당시로서 최신 시설로 고아들을 잘 돌보고, 키우는 모습을 보였지만,

실제로는 신도들의 자녀를 고아로 위장하고, 이들을 세뇌하여

아이들에게 ' 부모는 없고, 너희는 고아이며 박순자만이 진짜 어머니 ' 라고 유도 했는데,

심지어 아이들에게 ' 부모를 찾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 라고도 했다고 합니다

 

추가로, 신도들과 그들의 자녀들은 집단으로 공동생활을 했고,

그 과정에서 신도들을 통제했는데,

매월 한 번씩 신도들이 한 달 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실토하는

' 반성의 시간 ' 을 가졌는데, 규율을 어긴 것이 드러나면 벌이라는 명목 하에 집단 구타를 했습니다

 

 

박순자는 과거 암으로 사망선고를 받았었는데,

기도로 완되었다고 하며 이 이후 종교에 심취하고, 자신만의 종교인 ' 오대양 ' 을 창시했습니다

이는 1974년 횡격막에 병이 생겨 고통받던 박순자가 신 때문에 병이 회복되는 일을 겪었다고 했으나

사이비 종교 특성상 거짓말일 가능성이 크며 암이 아닌 횡격막이 이상이 생겼다는 것이 더 신빙성 있습니다

 

그리고 박순자가 사회사업가로 포장하고 복지사업을 하며 투자자에겐 확실한 이자로 신뢰를 확보한 일은

신도를 확보하기 위해서로 신뢰를 쌓은 후에는 오대양에서 함께 살자고 제안했습니다

 

여기서, 오대양의 교리는 77년 말세론으로 구원을 받기위해서는 교주의 지시를 따라야 했으며

오대양의 직원들은 채권자이자 동시에 채무자였던 것이었고,

오대양에서는 부부간에도 각방을 쓰도록 했습니다

 

여담으로, ' 오대양 ' 이라고 하는 교명은

박순자가 " 나는 오대양을 지배할 사람으로 앞으로 전 세계를 주관하게 될 것이다 " 라고

공언한 데서 나왔다고 합니다

 

 

오대양 사건이 일어나고 밝혀지기까지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1986년 4월,

박순자는 일본의 모 전자 부품 생산업체와 합작하여

당시로서는 정말 큰 금액인 7억원을 투자하여 전자제품을 만들려고 했는데,

사기를 당해 사업은 실패했으며

( 당시 대전 18평 아파트 시세는 1300만원선이었습니다 )

 

이 손실을 매꾸기 위해 신도들에게 사채를 많이 끌어오라고 하였습니다

신도들은 자신의 일가친척들에게 돈을 빌려 박순자에게 바쳤는데,

박순자가 신도들을 통해 끌어모은 사채로는 170억원에 달했다고 합니다

 

 

박순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사업자금으로 쓰고,

남는 이득은 모두 돌려주겠다고 하며 돈을 빌렸는데,

이자 지급은 은행 계좌로 정확한 시간에 보내줬었으며

 

이자율이 원금의 30~40%에

3년간 투자자들에게 이자를 지급해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박순자에게 돈을 빌려주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고 합니다

 

꼬꼬무에서 소개했던 주유소를 운영하는 부부도

박순자가 자수성가한 여성 사업가, 다양한 사회사업, 남편은 고위 공무원이었기에

신뢰하여 사업자금으로 5억을 빌려줬고, ( 부부의 친딸도 오대양 신도로 보입니다 )

후에 목돈이 필요한 부부가 큰딸에게 다시 돈을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하자

일부만이라도 회수하겠다고 하자 사장님과 직접 이야기 하라고 전하여

중년 부부는 대전 본사로 찾아갔습니다

 

부부가 본사에 찾아가 문을 열자

직원들이 부부를 둘러싸고, 문을 걸어잠근 후,

창고로 밀어 넣어 폭행하기 시작했고,

폭행 후 채권 포기각서 ( 채무 포기각서 ) 를 들이밀어 결국 지장을 찍고 풀려났으며

이 부부는 경찰에 고발했습니다

 

여기서, 이들 부부의 큰딸과 사위도 현장에 있었으나

부모가 맞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고 합니다

 

박순자가 경찰에 붙잡이고,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다른 채권자들도 박순자와 오대양을 고소했고,

경찰은 사기 혐의로 박순자를 조사하여 이 사건이 사회에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박순자가 경찰에 붙잡히자 졸도를 했고,

병원으로 갔지만, 박순자와 자식들이 자취를 감췄고,

그 이후 그 회사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모여든 채권자들은 2일만에 100명이상 액수는 80억이었는데,

( 당시 80억은 현 시세로 260억 이라고 합니다 )

 

그들이 자취를 감춘 후, 경찰에서는 단순 폭행에서 대형 사기 사건으로 수사 방향을 전환했고,

박순자는 지명수배 되었습니다

박순자의 남편도 박순자와 아이들을 찾기 시작했지만, 회사의 사실에 대해서는 몰랐다고 하였고,

이와 함께 대전 본사에 있던 직원들과 보육 시설 아이들까지 모두 사라져

한날 한시에 총 80명이 사라졌습니다

 

이 때, 용인 공장도 텅 비어있었고,

이 공장에서는 제조한 흔적이 없었으며

공장에서는 주방에서 일하던 장씨 아줌마만 남아있었습니다

 

장씨 아줌마는 박순자의 남편과도 안면이 있어

그는 사람들의 행방을 물었지만 ' 아무도 없다, 모른다 ' 로 일관했고,

박순자의 남편, 기자, 경찰 등이 공장을 뒤졌지만 아무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나흘 째 되던 날, 경찰에 제보전화가 걸려왔는데

" 사람들이 다 용인 공장에 있다 " 고 하였으며

창고 안을 뒤지던 경찰이 작은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창고 안쪽에는 박스가 벽처럼 보일 정도로 채워져있었는데,

박스 너머에 49명의 사람들이 3박 4일 동안 숨죽이고 숨어 있었던 것이었고,

나머지 30여명의 사람들 행방이 묘연했는데,

숨어있던 사람들을 조사해도 모두 묵비권을 행사하였습니다

 

여기서 발견되지 않았던 30여명의 사람들은 투자 유치를 많이 받아온 사람들이었고,

박스 뒤에 숨어있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돈을 적게 빌린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의 주업무는 공예품 제조가 아닌 돈을 빌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혈연, 지연, 학연을 동원해 돈을 끌어모았던 것이었죠

 

박순자의 남편은 주방에 있던 장씨 아줌마를 또 다시 추궁했을 때도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그 날 오후, 아줌마가 떨면서 " 공장에 찾으시는 분들이 있다 " 라고 하였고,

천장에 작은 구멍이 나있는데, 그 안을 들여다 보면 찾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 1987년 8월 29일 오대양 직원 김 모씨가 용인의 공장에 왔다가

내려앉은 숙소의 천장을 보고 이상히 여겨 식당 쪽으로 갔는데,

식당 천장에는 죽어있던 박순자를 포함한 32명을 발견하고,

때마침 가족을 찾으로 공장에 온 박순자의 남편에게 알렸으며

그 이후, 박순자의 남편이 오후 4시무렵 경찰에 신고해 집단변사가 세상에 알려졌다고도 합니다 )

 

 

 

천장에 올라가 손전등을 켰을 때, 속옷차림의 한 남자가 보였지만 불러도 아무 반응이 없었고,

그 위쪽을 봤더니 서까래에 목을 멘 것이었는데, 이 남자는 공장장 최모씨였습니다

 

장씨 아줌마는 " 다른 사람들도 다 저기 있는데 불러도 대답이 없다 " 라고 하였는데,

박순자의 남편은 상황을 알기 위해 사람을 불러모았고,

천장을 뚫어 올라가보니 목을 맨 공장장 최모씨 옆에 사람들이 누워있고,

12명의 사람들이 사망한 상태로 이불을 쌓아놓은 것처럼 2중, 3중으로 쌓여있었으며

5m 떨어진 곳에 시신이 더 있었습니다

 

이 시신들 중엔 박순자와 아이 셋의 시신까지 있었으며

공장을 뒤진 4박 5일 동안 찾지 못한 30여명이 천장에서 모두 사망한 채 발견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사건 현장을 발견한 사람들과 담당 형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천장 위의 상황은 참혹함을 뛰어넘어 매우 기괴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미스터리한 점은

이 시신들은 모두 속옷 차림, 잠옷 차림이었는데,

손은 결박되어있었고, 이들 중 몇몇은 목을 조른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31명은 교살, 공장장만 자살로 판명이 났는데,

부검 결과 독극물, 마취제도 없었으며 사망추정시간은 그 날 29일 새벽 1시부터 아침까지 였습니다

 

그 후 사건 현장 정리 도중 사망자들이 썼다고 보이는 메모들이 발견되었는데,

아래에 작성한 내용인 장씨 아줌마 에게 보내려던 쪽지로 보이는 내용 외에도

" 사장이 독약과 물을 가지러 갔다 ", " xx도 지금 매우 고통을 받고 있다 ",

" xx가 꿈을 꿨는데 그곳이 지옥이라고 하더라 ", " 남자는 다 잡혀가고 여자들은 다 헤어지고 .... "

하는 내용들이 쓰여있었다고 합니다

 

이 시간은 박순자의 남편과 식당 장씨 아줌마가 이야기를하고 있었을 시간이고,

변사체 피살 뒤 운반이 가장 유력한 가설이었으나

천장 위로 올라가보면 엉성한 판들이 붙어있고,

판 아래는 샤워실에 천장 위까지 수만은 지문들이 찍혀있었습니다

 

천장 바닥은 석고보드였으며 사람 무게를 견디는 건 어려워보였는데,

1992년 ' 그것이 알고싶다 ' 에서 제작진들은 세트를 지어 재연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체를 혼자 둘러메고 갈 수 없었을 것으로

당시 현장의 감식반도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32구의 시신들은 그 누구도 저항의 흔적이 없었다는 것이 가장 미스터리 한 것이며

현장을 살펴보면 경찰은 스티로폼 사이에서 종이를 찢은 조각을 발견했는데

그 종이조각에는 ' 절대로 입 닫아라. 이미 의식 없으시가. 네 시간 전부터 다섯명정도 갔다.

오늘 중으로 다 갈 것 같다. 성령인도로 너만 버텨라 ' 라는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이는 천장에 있던 사람이 장씨 아줌마에게 보내려던 쪽지로 보였으며

 

유일한 생존자이자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던 장씨 아줌마는

경찰에 계속된 추궁에 " 박순자 사장은 교주고 나머지는 신도 " 라고 진술하여

이 ' 오대양 '이 민속공예품 제조 회사가 아닌 종교 단체임이 밝혀졌습니다

 

32명의 사람들이 천장에 올라간 당시 상황

 

사망 전 박순자는 엄청난 사채 이자와 경찰, 언론의 압박까지 계속되자

자신의 가족과 전 신도들 80명과 함께 오대양의 용인 공장으로 모이라 하였고,

이들은 모두 빚진 사람들이었으며

천장에 숨으려 했지만, 너무 좁아 80명은 다 데리고 갈 수 없어

자신과 함께 천장에 올라갈 31명을 추렸습니다

 

박순자는 자신과 자녀들, 가장 투자자금을 많이 끌어올린 신도들을 추려

총 32명만 식단 천장에 올라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공장 창고내 구석공간에서 4일간 숨었습니다

 

천장에 올라가지 못해 생존한 사람들은

" ( 박순자가 ) 다 들림 받는다고 했다. 천국 소리가 들린다고 손을 잡고 있었다.

같이 못 올라간 게 너무 서운했고 ( 교주에게 ) 버림당한 기분이었다 " 고 말했습니다

 

박순자와 함께 천장에 올라간 신도들은

시멘트 통로 위에 각목과 합판을 깔아 은신처를 만들었는데,

각 1.7평, 2.9평, 0.4평이었고, 이 곳에서 32명이 4박 5일을 지낸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들이 천장으로 올라간 당시는 8월이었는데,

경찰이 낮에 온도를 쟀더니 70도까지 올라간 것을 보고,

다들 사망 후 발견된 모습이 속옷 차림이었던 이유가 더위 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32명의 시신들 중 교주인 박순자의 시신이 가장 부패가 심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나머지 사람들은 빚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라 자포자기의 상태였을 것이라고 하여

집단 자타살로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 당시 경찰은 박순자가 공장장에게 자신을 교살시키고,

뒤이어 공장장을 비롯한 남자들이 여자들을 교살시킨 후,

박순자의 두 아들들이 철골 서까래에 줄을 매고 자살한 하고,

공장장은 마지막으로 목을 메 자살했다고 판단했으며

 

사망자들이 스스로 멀미약과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

자의적으로 한 타살, 자타살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

 

 

그 이후 이야기

 

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집단 자살의 원인이나 자세한 경위에 대해서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채 수사가 마무리 되었다가

 

사건의 열쇠를 쥔 것으로 보이는 오대양 직원 11명을 공개수배 했고,

1991년 7월 오대양 종교 집단의 신도였던 김도현 등 6명이 경찰에 자수하면서

대전지방검찰정에서 재조사하여 사건의 의문점들이 밝혀졌습니다

 

 

 

자수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오대양 총무 노순호와 기숙사 가정부 황숙자, 육아원 보모 조재선 등

3명이 자살사건 전 이미 계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오대양 직원들에게 살해당한 후 암매장된 것으로 밝혀져습니다

 

하지만, 이에 따라 전면 재조사에 들어간 이 사건은

집단자살극인가, 외부인이 개입된 집단 타살극인가에 대한 논의만 무성했을 뿐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당시 부검 의사는 3구의 시체는 자살이 분명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교주인 박순자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교살에 의한 질식사가 분명하며

누군가에 의해 계획적으로 행해진 집단 타살극이라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1987년 경찰 수사와 동일하게 32명의 집단 자살 사건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이렇게 집단 자살 사건으로 결론이 났었지만,

외부인이 개입했을 것이다 등과 같은 타살설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후, 당시 이 사건을 수사했던 검사였던 박영수 변호사는

2014년 인터뷰에서 " 현장을 봤다면 타살 의혹을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 라며

타살설을 강하게 부정한 바있었습니다

 

 

그 외

 

오대양사건의 생존자들 증언에 따르면

위에서 언급했던 부부들에게 각방을 쓰게 하는 것 외에도

금욕 생활 및 외출도 금지하였는데,

2주에 한 번씩 많은 사람들끼리 단체로 외출하는 것만 허용했고,

외출 후에는 외출 시에 같이 나간 상대방이 밖에서 한 모든 행적을 일일이 보고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일본 사업 사기에 의한 건 일본인에 의한 것인지 사업을 소개시킨 한국인에 의한 것인지는 불명했는데,

민속 공예품 공장에 작업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미리 만들어놓은 공예품을 사놓았다는 증언 등으로

사업 실패도 거짓말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한 예로 이 종교집단에서는

딸이 어머니가 잘못한 것을 처벌한다면서 어머니를 두들겨 패고,

어머니는 이것을 감사해하는 황당한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익 곳은 용인시 남사읍 북리 707-1로 지번 변경, 도로명 주소는 삼인로 47-1이며

공장 자리에는 1989년 플라스틱 전자기기 부품업체인 세화정밀이 들어섰다가

2008년 경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현재는 비어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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